뫼르소는 왜 슬프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 알베르 카뮈 『이방인』

알베르 카뮈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 1913~1960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부조리와 반항의 사유를 문학으로 밀고 나갔다. 『이방인』, 『페스트』, 『시지프 신화』를 남겼고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진화 박사의 대중문화 칼럼 Ver.5

출처: 월간 리크루트

본 칼럼은 한국경제 월간 리쿠르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이방인』 줄거리 요약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양로원에서 보낸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받았다. 태양이 작열하는 더운 여름이었다. 그는 어머니 시신을 보고 싶지 않았다. 관리인이 물었다. “어째서 안 보시겠다는 거죠?” “글쎄요.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관 앞에서 담배를 피웠고 카페오레를 마셨다. 밤샘이 이어졌다. 다음 날 살인적인 더위 속에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 어머니의 약혼자 페레는 절뚝거리며 행렬을 따라왔다.

장례 다음 날 뫼르소는 연인 마리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일상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흘러갔다. 연인 마리가 물었다. “날 사랑해?” 뫼르소는 처음에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한다. 마리가 다시 사랑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그는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며칠 뒤 그는 레이몽과 마송의 별장에서 아랍인들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단도를 뽑아서 태양에 비추더니 겨누었다. 뫼르소는 칼날의 번뜩이는 빛으로 눈이 따가워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다시 네 발을 더 당겼다.

그는 살인죄로 법정에 섰다. 그는 슬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변호사와 검사는 자신을 두고 그의 감정에 대해 서로 다투었으며, 증언자들도 그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갔다. 친구들이 변론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런데 검사는 살인의 동기보다 그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이 남자에게는 영혼이 없습니다…. 사형을 요구합니다.”

 

뫼르소는 왜 사형선고를 받았는가

뫼르소는 아랍인을 살해한 죄로 법정에 섰다. 그러나 검사는 사건에 대한 정황을 자세히 묻지 않는다. 대신 어머니의 주검에 슬퍼하지 않는 아들의 영혼을 단죄한다. 예심판사가 말했다. “당신의 행동에는 이해하기 곤란한 점들이 많다. 어머니를 사랑했느냐.”

변호사가 외쳤다. “피고는 어머니를 매장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살인을 한 것으로 기소된 것입니까?” 검사가 답했다. “범죄인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어머니를 매장하였으므로 나는 이 사람의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살해하는 자는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서 영원히 말살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가장 근본적인 반응도 모르는 사람으로, 인정에 호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사형을 요구합니다.”

카뮈는 1955년 미국판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사형 선고의 위험에 처한다.” 뫼르소는 사람을 죽인 것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죄는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슬프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는 우리에게 ‘느낀 것’보다 ‘느껴야 할 것’을 먼저 묻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진짜 무엇을 느꼈는지 점점 알 수 없게 된다. 인간의 감정이란, 때로 그때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다.

 

뫼르소는 왜 자기 재판의 이방인이 되었는가

뫼르소는 자신의 사건 앞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는 피고석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 흥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뫼르소가 좋은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를 장례식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그를 죄인으로 증언했다. 나는 누구인가. 타인이 말하는 내가 나인가. 뫼르소가 자신을 변론하자, 변호사는 “가만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한다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법정에서 말하지 않음은 유예가 된다. 24시간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선고는 내려진다.

소설에는 또 다른 이방인들이 있다. 뫼르소가 죽인 그 아랍인은 소설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당시 알제리 사회에서 아랍인은 같은 공간에 살아도 동등한 시민으로 호명되지 못한 존재였다. 그래서였을까. 70년 후, 알제리 작가 카멜 다우드는 《뫼르소, 살인 사건》(2013)에서 그에게 ‘무사’라는 이름을 준다.

또 다른 이방인은 뫼르소가 감옥에서 읽은 신문 속의 체코 남자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 타향에서 살다가 어머니와 누이를 만나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온다. 그는 자신을 숨긴 채 큰돈을 벌었다고 자랑했다. 다음 날 그는 시신으로 발견된다. 아내가 찾아와 그가 아들이라고 말하자 어머니와 누이는 자살을 한다. 남자는 고향에서 이방인이 된 자였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체코의 남자에게도, 뫼르소에게도 죽음의 이유가 된다. 뫼르소는 그 이야기를 수천 번 읽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매일 이방인의 자리에 서고, 누군가로부터 재판을 받는다. 그리고 나를 증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상성을 요구받는다. 그런데 정상은 누가 정하는가.

 

밤하늘의 별과 다정한 무관심에 대하여

뫼르소는 감옥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어느 날 신부가 찾아와 “하느님이 반드시 도와주실 겁니다”라며 구원과 회개를 강요했다. 뫼르소는 평생 처음 분노를 터뜨리며 신부의 멱살을 잡았다. “사형선고는 인간의 심판이지, 그것으로 죄를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뫼르소는 사람을 죽였고,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만든 제도보다 자신의 죽음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신부를 쫓아낸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었다.

신부가 돌아간 뒤 감옥 안에는 깊은 평온이 찾아왔다. 그제야 밤하늘의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뫼르소는 생의 끝에서 자유를 느끼려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한다. 어머니의 자유가 보이자 자신의 자유도 보였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한 것처럼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면서도 자기 운명을 끝내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카뮈에게 인간의 위엄은 희망을 약속받는 데 있지 않았다.

뫼르소는 죽기 전 마지막 바람이 하나 생겼다.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기를…. 내게 남은 그 소원이 이루어질 때 나는 비로소 외롭지 않으리라.” 마지막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조리한 세상을 견디게 하는 다정한 무관심 아닐까. 우리는 지금, 누구의 기준에 맞춰 자신의 슬픔을 연기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질문

1. 당신은 지금, 누구의 기준에 맞춰 자신의 슬픔을 연기하고 있는가?

2. ‘느낀 것’과 ‘느껴야 할 것’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택해 왔는가?

3. 정상은 누가 정하는가. 그 기준을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노진화 박사 — 인문학 강연자 | 리더의 인문학 시리즈 저자

이 칼럼의 주제는 기업 인문학 강의 — 리더십, 조직문화, 변화관리 프로그램으로 확장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 강의·협업 문의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위로 스크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