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F. 스콧 피츠제럴드

F. Scott Fitzgerald | 1896~1940

미국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화려한 문체로 아메리칸 드림의 이면을 그려냈다. 『위대한 개츠비』는 사후 미국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재평가되었다.

노진화 박사의 대중문화 칼럼 Ver.3 | 문화기호읽기 3

출처: 월간 리크루트

본 칼럼은 한국경제 월간 리쿠르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위대한 개츠비』 줄거리 요약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1925>는 1920년대 미국사회의 광기와 욕망을 날카롭게 포착한 20세기 문학의 걸작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한 때,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의 집착과 열정, 욕망을 향한 아메리칸 드림이기도 하다.

소설은 화자인 닉 캐러웨이가 뉴욕 근처의 가까운 거리에 이사 오면서 개츠비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 문장에서 화자 닉은 독자에게 고정관념을 버릴 것을 그의 아버지의 말을 빌려 당부한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이 점을 명심하여라.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도 화자 닉은 조심스럽게 개츠비를 평가한다. ‘내가 드러내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것을 모두 대변하는 개츠비’라고 말이다.

개츠비는 젊은 시절, 상류층 출신의 데이지와 사랑에 빠졌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몇 년 후, 개츠비는 밀주사업과 도박장을 운영해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리고 데이지의 집이 보이는 맞은 편에 커다란 저택을 구입하고, 데이지 앞에 나타난다. 하지만 데이지는 이미 톰과 결혼하고 아이를 두고 있었다.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적극 구애를 한다.

“네가 톰과 결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해. 모든 게 다 네 꿈이었다고 말하는 거야.”

데이지는 끝내 개츠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츠비의 과거는 결국 톰에 의해 정체가 폭로되고, 술렁이던 파티도 끝나버리고 말았다. 개츠비는 사랑했던 여인 때문에, 살인범으로 몰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닉과 아버지 외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화려했던 저택은 먼지 쌓인 폐허로 변해버렸고, 개츠비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집착이었을까.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슬라예보 지젝은 개츠비가 ‘대상a’를 향해 미끄러지는 주체의 전형, 욕망과 실존의 부족이라고 분석했다.

욕망은 애초에 채워질 수 없는 근원적 결핍에 뿌리를 두고 있다.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실재계’의 균열은, 상징계 속에서 언표화될 수 없는 트라우마나 공백을 의미한다. 주체는 이 실재의 공백을 ‘대상 a’로 메우고자 한다. 하지만 ‘대상 a’란 존재론적으로 불가능한 대상이며, 오직 주체 내부의 환상으로만 존재한다. 주체는 이 환상적 대상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과정에서 욕망은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대상의 실재를 벗어나 상상적 차원을 배회한다. 따라서 개츠비가 사랑한 건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데이지가 아니라, 자신의 환상이 빚어낸 이상화된 이미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알레고리는 물화된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욕망의 메커니즘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더욱 날카로운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대상 a의 신기루로 주체들을 유혹하고 욕망을 자극한다. 그 과정에서 주체는 소외되고, 실재와의 만남은 좌절된다. 개츠비의 좌절된 꿈은 소비 자본주의의 욕망 구조와 그 이면의 실존적 공허함을 은유한다.

 

참된 실존을 지향할 것을

1920년대 미국 사회는 실존적으로 불안한 시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사회 전반에는 들뜬 분위기가 팽배했다. 자동차와 라디오, 영화가 대량생산되면서 대중문화가 융성했고, 도시는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장식되었다. 사람들은 최신 유행을 따르고 즐거움을 찾아 끊임없이 소비했다. 전쟁의 참상이 남긴 트라우마와 상실감은 화려한 일상에 가려져 있었다.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는 이런 내면의 상처를 봉합하는 일종의 도피처로 기능했다. 사람들의 돈과 물질에 대한 집착은 도를 넘어 일종의 광기 수준이었다. 금주법으로 음주 자체가 일종의 쾌락이자 범죄로 여겨지면서, 위선과 타락이 만연했다.

따라서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상품화된 관계 속에서 진정한 애정과 교감을 상실한 채 표류한다. 톰과 데이지의 결혼생활은 물질적 이해관계로 점철된 냉소적 관계의 전형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마저 상품처럼 취급되는 세계인 것이다. 개츠비의 화려한 파티 장면은 소비주의가 만들어낸 현란한 스펙터클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메리칸 드림 역시 물신주의가 낳은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츠비가 이룬 부는 오히려 그를 몰락으로 이끈다. 자본은 결코 주체의 결핍을 메워주지 못하며, 오히려 소외와 비극만을 낳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개츠비는 위대했다. 가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엄청난 부를 이뤘고, 순수했던 첫사랑 데이지를 향한 변함없는 욕망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결말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개츠비의 위대함은 피상적이고 역설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다. 성공일지, 실패일지는 끝까지 가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또한 ‘위대한’이라는 단어는 개츠비의 욕망이 지닌 과잉성과 폭력성의 역설로 해석될 수도 있다. 개츠비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으로 전개되며, 성공 역시 부정한 방식이다. 그것은 개츠비의 욕망에 담긴 이상과 환멸, 순수함과 왜곡, 성공과 좌절을 아우르는 역설적 표현인 셈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근대 이후 인간이 맞닥뜨린 실존적 난제를 드러낸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욕망하는가? 욕망에 사로잡힌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부와 명예를 향한 집착이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도 여전히 물질적 풍요와 성공이 최고의 선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소설은 물질이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는 냉소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품은 욕망 너머의 참된 실존을 지향할 것을 당부하는 것 같다.

만약 우리가 개츠비처럼 ‘녹색 불빛’만을 바라본 채 황폐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결말 또한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소유가 아닌 존재, 물질이 아닌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 따라서 근원적 결핍에 뿌리를 두지 않고, 욕망에 미끄러지지 않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생각해 볼 질문

1. 과거의 사랑이나 이상을 되찾으려는 노력은 아름다운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가?

2. ‘아메리칸 드림’이 허상이라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짜 꿈은 무엇인가?

3.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과 자신을 위한 삶 사이에서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노진화 박사 — 인문학 강연자 | 리더의 인문학 시리즈 저자

이 칼럼의 주제는 기업 인문학 강의 — 리더십, 조직문화, 변화관리 프로그램으로 확장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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