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의 섬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원칙 –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

대니얼 디포

대니얼 디포

Daniel Defoe | 1660~1731

영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 영국 소설의 선구자로, 사실주의적 서술의 토대를 마련했다. 『로빈슨 크루소』는 300년간 모험 문학의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노진화 박사의 대중문화 칼럼 Ver.4

출처: 월간 리크루트

본 칼럼은 한국경제 월간 리쿠르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로빈슨 크루소』 줄거리 요약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는 무인도에서 28년을 살아남은 한 남자의 이야기다. 18세기 영국, 중산층 가정의 아들 로빈슨 크루소는 아버지의 충고를 거부하고 바다로 떠난다. 아버지는 말했다. “집에 머물러라. 중간 계급이 기쁨이 없이 고생하지 않고, 정신적인 괴로움도 없다.

” 그러나 크루소는 대답했다. “저는 낮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요.” 그는 노예 상인이 되었고, 브라질에서 농장을 일구었다. 성공했고 충분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배에 올랐다. 대부분의 모험은 재앙으로 이어졌다.

가장 큰 재앙은 1659년, 남미로 향하던 배가 폭풍을 만나 난파한 것이다. 홀로 살아남은 크루소는 무인도에 표류한다. 그는 난파선에서 도끼, 총, 밀가루, 성경을 가져온다. 그는 섬에서 홀로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길들이며 생존의 방법을 터득한다. 존재를 기억하기 위해 일기를 쓰고, 신에게 기도하며, 내일의 곡식을 위해 노동을 한다.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아버지의 조언을 무시한 것은 백치처럼 미친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조언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15년째 되던 해, 섬에 식인종들이 나타났다. 크루소는 처음 본 인간들이 반가웠다. 그러나 그들은 식인종이었다. 포로 한 명을 구해준 댓가로 그는 친구를 얻는다. 그의 이름은 프라이데이(금요일)이다. 크루소는 그에게 영어와 기독교를 가르치고, 주인과 하인, 기억속에 있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만들어 나간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날 섬에 영국 배 한척이 도착한다. 그리고 그는 영국으로 돌아간다. 섬을 떠나며 그는 자신이 세운 왕국을 뒤돌아본다. 고립의 섬은 이제 질서의 왕국이 되어 있었다.

 

작품 해석

크루소는 왜 떠났는가

그는 아버지의 품안에서 중산층으로 편안히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없이 방랑의 길을 떠난다. 왜? “나도 모른다.” 로빈슨의 고백이다. 설명할 수 없는 감동, 만족을 모르는 본성,  인간은 중간에 머물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그만하면 충분해.” 아버지의 충고는 멈추기를 바라지만 그는 원한다.

안전이 아니라, 불완전함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결국 무인도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나서야, 안전의 소중함을 느낀다. 그러나 크루소는 그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홀로서야 한다.

만약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못했을 때, 그가 홀로서지 못했다면 무엇이 되는가? 또 다른 고립, 루틴의 포로, 안전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떠나지 않으면 자기안에 ‘자기’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크루소는 난파 후에도 브라질 농장을 개척했고, 섬에도 곡식을 심고 창고를 쌓았다. 새로운 것을 탐험하고, 확장하고, 개척했다. 물론 때로는 후회했다. 그래서 그의 항해는 여행이 아니라 자기해석의 반복이다. 떠남은 운명을 시험하려는 오만이 아니라, 자기주권을 바깥의 우연에 노출시켜 검증하려는 시도다.

누군가는 크루소는 28년이라는 시간을 잃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28년이 그를 만들었다. 안전한 브라질에 머물렀다면, 그는 평범한 농장주로 늙었을 것이다. 그러나 섬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왕이 되었다. 나는 지금 안전을 택하는가, 아무도 가지 않는 모험을 택하고 있는가?

 

크루소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우리는 아무도 없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 크루소가 홀로 섬에 남았을 때, 그는 고립되지 않기 위해 사회를 만들었다. 인간은 단 한 명 뿐이었지만, 문명의 질서를 세웠고, 보이지 않는 신을 믿었고, 스스로를 기록했다.

자신의 기록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달력을 만들고, 일기를 썼다. 1659년 9월 30일, 그는 무인도에 홀로 살아남아 난파선에서 도끼, 못, 총, 화약, 성경을 건져 온 후, 기둥에 글씨를 새긴다. “오늘 나는 여기 표류하다.” 섬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매일 시간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을 했다. 곡식을 심고, 동물을 키우고, 포도주를 만들었다. 시간이 날 때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요나의 이야기로 자신을 해석했다. 신앙은 고립을 견디는 유일한 언어였다. 그래서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살아남았으므로 인간답게 살았다.

그러나 모두가 크루소 같지는 않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문명에서 살다가 섬에 고립된 소년들이 얼마나 야만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로울 때 위험하다.

우리는 어떤 섬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고립되지 않지만 크루소보다 더 깊이 고립되어 있다. 살아내는 힘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온다.

 

28년 동안 크루소는 정말 혼자였을까?

크루소가 살던 섬에는 개, 고양이, 프라이데이, 그리고 성경책이 있었다. 개는 불안한 밤의 경계가 되고, 앵무새는 “불쌍한 로빈 크루소….”를 반복해서 말한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는 배구공 윌슨에게 이름을 붙이고, 대화하고, 윌슨을 잃었을 때 울었다. 고립된 자에게는 사물도 동반자가 된다. 어느 대상이든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하나의 생명이 된다.

그러나 병은 달랐다. 인간이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병은 그를 철저하게 고립시킨다. 병과 공포를 통과한 밤, 그는 기도한다. “주여, 저는 커다란 고난에 빠졌나이다.” 그는 모든 것이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어야만, 자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치 고대의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현상을 신의 뜻이라고 이해한 것처럼. 그리고 한때 포로였던 프라이데이에게 언어와 문명을 가르친다. 크루소의 일기는 보고서가 되고, 달력은 예식이 되며, 가르침은 관계가 된다. 그는 스스로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28년 동안 그를 기억하고, 재산을 지키고, 기다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정착은 그의 본성이 아니었다. 사회적 의무를 마쳤다고 생각한 어느 날, 그는 다시 떠난다. 진짜 고립은 사람이 없을 때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존재가 없을 때다. 우리는 잃어버린 세계를 동경한다. 그것은 크루소가 다시 여행을 떠난 이유일지도 모른다. 당신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섬’이 있는가?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섬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섬처럼 홀로 설 수 있는 용기일지 모른다.


생각해 볼 질문

1.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당신이 가장 먼저 지키려 할 것은 무엇인가?

2. 고립된 환경에서도 ‘원칙’을 지키는 것이 왜 중요한가?

3. 진정한 자립은 혼자의 힘으로 가능한가, 아니면 타인이 필요한가?

노진화 박사 — 인문학 강연자 | 리더의 인문학 시리즈 저자

이 칼럼의 주제는 기업 인문학 강의 — 리더십, 조직문화, 변화관리 프로그램으로 확장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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